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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자청화철채원숭이포도문 화분받침. 여기에 아주 진귀한 유물이 있습니다. 유물 이름이 ‘백자청화철채원숭이포도문 화분 받침’입니다. 좀 길고 복잡하죠. 백자로 만들었고 푸른빛을 내는 청화와 쇳가루를 짙게 바르는 철채 기법으로 채색한 원숭이와 포도 문양이 들어간 화분 받침이란 뜻입니다. 구멍이 숭숭 뚫린 투각 기법으로 만들었으니 화분은 아니었겠고, 필시 화분을 올려놓는 받침으로 쓰였을 겁니다. 먼저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 유물이 대단히 희귀하다는 점입니다. 교과서에도, 박물관에도 없습니다. 수많은 도자기 유물을 봐 왔어도 화분 받침은 저도 처음입니다. 도자기 관련 서적을 아무리 뒤져봐도 이런 유물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 화분 받침은 저 유명한 우리 문화재의‘보물창고’간송미술관 소장품인데, 그동안 수장고에 꼭꼭 숨어 있었지 외부에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이 자리에서 최초로 공개하는 겁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의 손자인 전인건 선생에게 여쭤보니 사연이 있더군요. 이 유물 역시 간송미술관의 다른 보물들과 마찬가지로 간송 선생이 생전에 수집한 것이랍니다. 처음부터 일부가 깨진 채로 인수한 것인지, 아니면 6.25 전란의 와중에 유물을 쌌다가 푸는 과정에서, 또는 어떤 다른 사연이 있어서 그랬는지 일부가 손상됐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보시는 것처럼 수리해서 옛 모습을 되살렸는데, 그 뒤로 간송 선생이 이렇다저렇다 말씀이 없었다는 거죠. 그래서 지금껏 미술관 수장고안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는 겁니다. 요즘 웬만한 문화재는 인터넷 검색으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유물은 인터넷을 뒤져도 안 나옵니다. 유물 등록이 안 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희귀한 유물의 존재를 알게 된 것 자체가 천행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유물 이름도 문화재청의 유물 명칭 부여 기준을 참고로 전인건 선생이 이번에 처음 붙인 겁니다. 어딘가에 꼭꼭 숨어 있던 유물은 그렇게 새 이름을 얻어 세상 밖으로 나올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법입니다. 생김새로 보아 만들어진 시기는 조선 후기, 즉 18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는 게 전인건 선생의 전언입니다. (다만, 실물을 보지 못해 크기나 폭이 얼마인지는 아쉽게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 화분 받침 속 원숭이 형상. 사실 간송 전형필 선생의 수집품이란 점과 여기에 최초로 공개한다는 점을 빼면 예술적으로 그리 높게 평가할 만한 구석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제가 이 유물을 중요하게 소개해드리는 건 바로 유물 안에 숨어 있는 원숭이 때문입니다. 이 화분 받침에는 원숭이 두 마리가 새겨져 있습니다. 먼저 왼쪽 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마치 울창한 숲 한가운데서 나무 타기를 하듯 두 팔을 벌린 원숭이의 형상이 나타납니다. 입 모양을 한 번 보세요. 뭐가 그리 좋은지 씩 웃고 있습니다. 숲 속에 몰래 숨어서 나 찾아봐라, 하는 것 같지 않나요? 손과 발의 묘사는 또 어떻습니까. 손가락, 발가락 하나하나까지 섬세하게 표현된 참으로 사랑스러운 모습입니다. 이번엔 오른쪽 사진을 한 번 보시죠. 원숭이가 물구나무를 서 있습니다. 여기서도 예의 천진난만한 표정은 변함이 없네요. 자기 머리만한 포도 알에 척하니 올려놓은 손을 보면 이 도자기를 구워낸 도공의 미적 감각에 감탄하게 됩니다. 상대적으로 빚어내기가 수월했을 나무줄기와 잎사귀, 포도송이와는 비교도 안 되는 정교한 손길이 말 그대로 생생하게 녹아든 명품입니다. ▲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 이왕 얘기가 나왔으니 간송미술관의 명품을 하나 더 소개할까 합니다. 위 사진에 담긴 유물은 저 유명한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입니다. 워낙 그 명성이 자자해서 더 긴 말이 필요 없는 고려청자의 기념비적 걸작으로 국보 제270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12세기 중반 것으로 높이가 9.9 센티미터입니다. 고려 시대에는 귀족들이 원숭이를 애완용으로 많이 길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먹을 갈 때 벼루에 따를 물을 담아 두는 그릇으로 만들어져 고려 문인들의 책상 한 귀퉁이를 장식했을 겁니다. 원숭이 형상을 새긴 연적은 이것 말고도 전해지는 것이 더 있습니다만, 이 유물은 다른 그 모든 유사품을 통틀어 조형성이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힙니다. 어미 원숭이가 새끼를 품고 있는 사랑스러운 모습에서 모자의 애틋한 정이 진하게 느껴집니다. 새끼가 한쪽 손을 들어 어미의 볼을 더듬는 모습은 또 어찌나 앙증맞은지요. 저명한 미술사학자 안휘준 선생은 <청출어람의 한국미술>이란 책에서 중국의 영향을 뛰어넘어 우리의 독자적인 미술로 승화시킨 고려청자의 빛나는 예술성을 소개하는 자리에 이 유물을 당당하게 올려놓았습니다. ▲ 청자 원숭이모양 먹항아리. 안휘준 선생이 책에서 연적과 나란히 소개한 또 다른 유물이 있습니다. 바로 원숭이 모양의 먹 항아리입니다. 한자로 묵호(墨壺)라 해서 먹을 담는 그릇이었습니다. 물 담는 연적에 먹 담는 묵호까지 우리 눈을 호강시켜주는 이런 귀한 유물을 만들어 쓸 줄 알았던 고려시대 귀족들의 취향은 실로 대단히 세련된 것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유물 속 원숭이의 표정을 한 번 보실까요. 지금까지 본 원숭이 가운데 가장 연기력이 뛰어납니다. 물동이가 얼마나 무거우면 저리도 입을 헤벌리고 잔뜩 인상을 찌푸렸을까요. 높이가 7.1 센티미터에 지나지 않는 이 작은 도자기에 어떻게 저토록 생생한 표정을 새겨 넣었을까요. 그런데 안휘준 선생은 정작 책에서 이 유물을 ‘연적’으로 잘못 소개해 놓았습니다. 이 먹항아리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라서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소장품 검색을 하면 ‘청자 원숭이 모양 먹항아리’라고 금방 나옵니다. 이미 너무나도 유명해진 문화재이니만큼 잘못된 부분은 수정돼야 옳겠지요. 아무튼, 안휘준 선생은 이 두 가지 유물에 대해 상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도공들 머리에서 이렇게 다양하고 창의적인 생각이 나왔을까 하는 점이 경이롭습니다. 그들은 미술대학 도예과를 나온 것도 아니고, 교육조차 받지 못한 지극히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흙만 만지는 도공들이었죠. 그런데 그 도공들의 머릿속에서 어떻게 이처럼 기발한 생각들이 나왔는지, 그리고 그들의 손에서 어떻게 이처럼 훌륭한 예술이 빚어졌는지 수많은 뛰어난 고려청자들을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됩니다.” ▲ 석제 십이지신상 중 원숭이(왼쪽)와 토우 원숭이(오른쪽) 원숭이가 우리 유물에 등장한 역사는 유구합니다. 12지 가운데 아홉 번째 동물인 원숭이는 돌을 깎아 만든 십이지신상에서 흔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위의 왼쪽에 보시는 유물은 신라 33대 왕인 성덕왕의 능 주변을 지키고 있던 십이지 석상 가운데 원숭이 상입니다. 십이지가 방위와 시간을 지키는 신으로 여겨졌음을 생각할 때 오른손에 칼을 든 이 원숭이 석상은 신성한 왕의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의 성격을 지녔던 겁니다. 오른쪽 유물은 신라시대, 즉 5~6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원숭이 모양의 토우입니다. 경북 경주시 황남동에서 출토된 유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해설에 “두 발을 앞으로 모으고 시선을 앞으로 두고 포효하고 있는 듯 바위 위에 당당한 앉아 있는 원숭이 토우로 원숭이 무리 중에서 대장 원숭이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고 적어 놓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미술사적 흔적은 불교의 전래 과정에서 우리 문화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걸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토록 긴 시간 동안 원숭이가 조각으로, 그림으로 남았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죠. 원숭이는 적어도 우리에게는 신성하고 상서로운 동물이었던 겁니다. 때론 장수를, 때론 입신양명을 기원하는 의미도 담겼습니다. ▲ 정유승 ‘군원유희’. 원숭이는 드물기는 하지만 조선시대에도 회화의 소재가 됐습니다. 위 그림은 무려 원숭이 여덟 마리가 한꺼번에 등장하는 희귀한 작품입니다. 원숭이들이 장난을 치는 모습을 그렸는데, 동작이며 표정에 장난끼가 가득하죠. 하지만 익살스럽고 재미있는 그림과 달리 붙어 있는 시의 내용은 뜻밖에도 이별의 정한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용을 잠시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척재가 자리를 잡은 지 몇 달이 지났다. 헤어진 이후 옛 친구가 생각나 시 한 수를 적어 보낸다.” 뒤에는 유배 떠나는 친구를 보내는 마음을 담은 당나라 때 시를 붙여 놓았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이는 조선 후기 남종문인화의 대가인 현재 심사정의 외할아버지로 역시 당대에 이름 난 화가였던 취은(醉隱) 정유승(鄭維升,1660~1738)입니다. 포도와 인물, 동물 그림에 능했다 하고, 숙종 어진을 그릴 때 감조관(총괄 자문 역할)을 지냈으니 회화에 일가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김익주 ‘노원’. 이 작품은 조선 후기 화가인 경암(鏡巖) 김익주(金翊冑, ?~?)의 ‘노원(老猿)’이란 작품입니다. 조선 후기의 대 수장가인 석농 김광국의 기념비적인 화첩 <석농화원>의 별집에 실린 그림인데, 제목과 화가 이름과 함께 그림이 도판으로 실려 있을 뿐 작품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그래도 그림이 남아 있는 건 이 책의 또 다른 판본으로 여겨지는 <화원별집>이란 화집에 같은 그림이 수록돼 있기 때문입니다. 늙은 원숭이가 나무 아래 가만히 앉아서 화면 왼쪽 위 나뭇가지에 매달려 재롱을 부리는 새끼 원숭이를 넌지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인물화에선 이런 내용과 구도의 그림이 발견되지 않는 걸 보면, 아마도 화가가 원숭이를 의인화해서 그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경암 김익주는 조선 영조 대에 활동한 화가로 당대의 유명한 도화서 화원이었던 김두량과 쌍벽을 이룬다 할 정도로 그림 솜씨가 뛰어났던 모양입니다. 산수, 초충, 화조 등 다양한 소재의 그림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 쇠라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그렇다면 서양에선 원숭이가 어떤 존재로 묘사됐을까요? 참고로 여기에 아주 유명한 그림 한 점을 소개합니다. 우리 흔히 점묘파의 대표 화가로 알고 있는 조르주 쇠라의 대표작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란 작품입니다. 시카고 미술관에 소장된 이 작품 오른쪽에 나란히 서 있는 신사와 여인의 발아래를 보면 원숭이 한 마리가 그려져 있습니다. 서구에서 원숭이는 몸 파는 여인과 관련이 있는 동물로 여겨졌다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화가는 원숭이를 그림 안에 슬쩍 그려 넣어 뒤에 서 있는 남녀의 은밀한 관계를 암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혹자는 그래서 신사와 고급 창부일 거로 추측했지요. 사람과 닮았고 사람을 흉내 내지만 정작 사람은 될 수 없는 원숭이에게 흔히 ‘교활하다’는 이미지가 덧씌워진 한 가지 사례입니다. 종교적, 문화적, 역사적 뿌리가 다른 동서양의 차이가 이런 데서도 극명하게 드러나는 셈입니다. ■ 유물을 소장한 곳 백자청화철채원숭이포도문 화분받침, 간송미술관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 간송미술관 청자 원숭이모양 먹항아리, 국립중앙박물관 석제 십이지신상 중 원숭이, 국립중앙박물관 토우(원숭이), 국립중앙박물관 정유승 ‘군원유희’, 간송미술관 김익주 ‘노원’, 국립중앙박물관 조르주 쇠라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시카고 미술관 ■ 참고한 책 간송문화전 5부 도록 <간송문화: 화훼영모 – 자연을 품다>(간송미술문화재단, 2015) 간송미술문화재단 설립 기념전 도록 <간송문화>(간송미술문화재단, 2014) 나카노 교코 <미술관 옆 카페에서 읽는 인상주의>(이봄, 2015) 안휘준 <청출어람의 한국미술>(사회평론, 2010) 유홍준, 김채식 옮김 <김광국의 석농화원>(눌와, 2015)